촌놈의 촌 이야기

소풍(지금의 현장 학습에 대하여)

인생 뭐 있나 2020. 10. 1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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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의 촌 이야기는 거의 읽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꾸준히 쓰고 싶은 이유는

아들이 가끔 보기 때문이다.

아들이 내 블로그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촌놈의 촌 이야기 시리즈이다.

그리고 나도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 옛날이 그립다.

그때는 깡촌이 싫어 도시로

공부하러 나가게 해 달라 졸라

어린 나이에 도시로 나왔는데.

지금 고향에는 내가 알던 어른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고

어릴 적 동네 형과 동생들은 타지에서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그때에 추억을 되새겨 적어본다.

다시 20년이 지나고 내가

이 글을 흐뭇하게 읽을 날을 바라며.

2020년 어느 가을에.

 

올해는 아들이 현장학습 간다는 말이 없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작년과 그 전년을 보아도 아들 녀석이 현장학습 간다고 아주 기뻐하거나 밤잠을 설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의 어린 시절 현장학습이란 말은 없었지만 소풍이라는 말을 있었다.

그 "소풍"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우선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아니 이제부터 그냥 초등학교라고 하겠다.

초등학교에서는 두 번에 소풍을 갔다.

봄 소풍과 가을 소풍.

봄 소풍은 전 학년이 매년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갔다.

학교로 등교 후 전 학년이 걸어서 이동했다.

학교에서 2km 떨어진 곳에 넓은 잔디밭이 있었다. 

거기가 봄소풍 장소였다.

봄 소풍을 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장기자랑이었다.

학년 학반별로 올라가서 장기자랑을 했다.

학년 학반별로 해봤자 12반이 전부였지만.

그때 장기자랑에서 최고의 인기는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의 댄스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

장기자랑 하나를 위해 몇 km를 들고 온 카세트 플레이어.

그리고 정식 판매용 테이프도 아니고 라디오에 노래 나올 때 겨우 녹음한 공테이프.

음악 틀어놓고 춤을 추면 거의 1등은 확정이었다.

그다음 많이 하는 것이 유머 일번지 따라 하기.

하지만 이건 유행어나 잘 따라 하지 소품도 없고 재미도 별로 없어서

하는 아이들이나 낄낄대며 웃었지 보는 사람이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우리가 장기자랑에 혼이 빠져 있으면 담임 선생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바로 보물찾기.

보물을 숨기러 몰래 가셨다.

이때 보물(선생님 도장이 찍힌 종이를 접은 것)을 숨기고는 어느샌가 자리로 돌아오시는 선생님.

난 보물 찾기에는 재능이 너무 없어서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보물을 한 번도 내손으로 찾지 못했다.

친한 친구가 2개 찾으면 나 하나 줘서 겨우 공책을 탔을 뿐.

그리고 장기자랑과 보물 찾기가 끝나면 바로 대망의 점심시간.

고향 시골 마을에서 김밥을 먹은 날은 정말 1년에 이틀.

딱 이틀이다.

봄 소풍날과 가을 소풍날.

지금이야 김밥이 지옥도 아니고 천국에 갈 만큼 여기저기 많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초등학교 소풍 갈 때 썼던 크기의 도시락이면 우리 큰 아들 작은 아들 다 먹고 남았을 거 같다.

김밥이 끝이 아니다.

저마다 커다란 책가방을 그대로 소풍에 들고 오는데.

김밥 도시락, 콜라나 사이다 1.5L, 나머지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의 과자로 채워진다.

보통 새우깡, 고구마깡, 죠리퐁 등의 과자가 100원 할 때인데.

평균적으로 소풍 가면 2000원 정도의 용돈을 받았다.

그걸로 가방에 빈틈을 찾지 못할 만큼의 과자를 눌러 넣어 들고 간다.

소풍장소로.

저마다 콜라며 사이다며 1.5L 병을 가방에서 꺼내서 마신다.

물론 저걸 다 먹지는 않는다.

집에 가져가서 저녁에도 먹어야 하기에.

서로서로 과자를 바꿔먹기도 하고 음료수도 나눠먹고.

수업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최고의 날이 소풍이었다.

그 당시는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이 뺨을 퍽퍽 때리던 시절이라 수업 시간은 엄청나게 긴장되는 시간인데.

수업을 안 할 뿐만 아니라 1년에 2번 먹는 김밥도 먹고 평소 잘 먹지 못하던 과자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새우깡이 100 원하던 시절이라 과자는 그래도 가끔 사 먹지만 음료수는 그보다 비쌌기에 잘 사 먹지 못했다.

사이다, 콜라 1.5L를 사서는 점심에 먹고 반 먹고 저녁에 동네 아이들과 동네에서 2차로 마셨다.

(그때부터 1차, 2차 문화가 있었으니)

소풍 전날이면 어머니가 무척 싫어하셨던 게 기억난다.

음식 솜씨가 별로라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우리 어머니.

선생님 김밥 도시락 산다고 엄청 정성을 쏟으셨다.

그때는 반장 부반장 기타 등등도 선생님 도시락을 싸서 드렸는데, 특히 반장 부반장은 필수였다.

(그 많은 도시락을 선생님이 다 드시지는 않으셨고 도시락 못 사온 친구에게 주곤 하셨다.)

소풍의 하이라이트 점심시간이 지나면 이제 반별로 모여서 수건 돌리기, 닭싸움을 하고 2~3시쯤 소풍이 끝난다.

끝나고 나면 평소 사지 못한 장난감을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가지고 놀면서 집으로 갔다.

줄을 잡아당기면 하늘로 날아가는 프로펠러 등등을.

뭐 집에 도착하면 벌써 고장 나있었지만.

가을 소풍은 학년별로 이동한다는 것과 장소가 학년별로 다르다는 것 그 두 가지만 다르고 봄소풍과 똑같다.

소풍 전날 동네 아이들은 9시 뉴스를 꼭 본다.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프로그램이 뉴스였는데, 날씨를 봐야 하기에 그날은 뉴스가 가장 재미있는 날이었다.

가서 자라고 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아이도 없다.

30분마다 나가서 하늘을 살펴본다.

혹시나 먹구름이 몰려오나 오지않나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비가 와 야외 소품을 못 가면 최악의 소풍이 된다.

교실에서 김밥 도시락만 먹고 반별 장기 자랑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3번 정도 비가 와서 야외 소풍을 못 간 것 같다.


최악의 소풍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난 정말 이른 시기에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중학교 2학년 때 대도시로 전학을 나왔다.

하필 전학 오고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대도시에 전혀 적응을 못했는데 소풍을 간다는 것이었다.

곧 소풍일이라고 하니 기분 좋았는데.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소풍이 될 줄이야.

대도시의 소풍은 시골 소풍과 전혀 달랐다.

담임 선생님이 어느 어느 유원지로 몇 시까지 와라가 전부였다.

난 버스 노선도 잘 몰랐지, 친구도 아직 없어서 같이 가자고도 못하지, 물어볼 부모님도 안 계시지.

소풍날이 되자 너무 불안했다.

버스 기사에게 타기 전 "어느 유원지 가나요?"라고만 물어봤어도 되었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묻는 게 촌놈 티 내는 것 같아서 never, 절대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대충 반 친구들 이야기 주어 들은 데로 그 당시 18번 버스에 탑승했다.

1시간이면 도착해야 하는데 버스가 종점에 도착해도 유원지는커녕 이상한 논밭만 보일 뿐이었다.

종점에서

"학생 안 내려? 종점인데? 학교 안 가나?"

차라리 그 버스 타고 다시 집으로 갔으면 되었을 걸.

내성적이던 나는 그 말에 얼굴이 벌게져 버스에서 뛰쳐나왔다.

미친 듯이 달려 버스가 온 길을 거슬러 가서 전혀 다른 노선의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하루를 방황하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고 버스 기사님에게 물어보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소풍은 고사하고 집에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그 당시 팔다리가 부러져도 아니 쓰러져도 학교에서 종례 마치고 집에 가던 시절이다.

조퇴 한 번이면 개근상이 사라지기에.

다음 날 짝꿍이 왜 안 왔냐 인사치레로 물었지만 몸이 안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에게는 사실대로 말했더니 결석 체크하지는 않으셨다.

옆 반 담임이시던 국어 선생님은 배꼽 빠질 듯 웃으셨는데.

그 국어 선생님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 정말 잘해주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 0번부터 126번 버스까지 노선을 다 외웠다.

한번 외운 버스 노선을 3자리 숫자로 바뀌기 전까지 정말 유용하게 잘 써먹었다.

그 때 알게된 사실 소풍날 난 버스를 반대방향으로 탔다.

종점에서 그냥 앉아있었다면 조금 늦었어도 소풍을 갔을텐데.


좋았던 소풍과 최악의 소풍을 적어보았다.

소풍~가고 싶다.

설레는 소풍을.

그 많던 동네 형들과 친구들은 뭐 하고 있을까?

 

어린 시절, 그 시절도 어렵고 힘든 일이 많았는데.

아프고 슬픈 기억은 사라지고 좋은 추억만 기억에 남았는지 그때가 참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때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내일의 소풍을 걱정하던 친구들과

소풍 바로 전날의 설렘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데.

"난 너를 봐도 설레지 않아."

어떤 영화였나, 드라마였나 남자 주인공이 이말하고 헤어지는 장면이 떠오를 만큼.

요즘은 그런 설렘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때 장기자랑으로 준비한 박남정의 사랑에 불시착 댄스가 지금도 가능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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