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인생 뭐 있나 2020. 10. 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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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의자에서 잠시 일어설 짬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주차장에서 무심코 영웅문 s 어플을 실행시켰다.

영웅문이라니 핸드폰 게임인가 하는 분도 있겠지만 키움의 주식 거래 어플이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산 현대약품 주식이 9% 이상 올랐다. 

왜 이러지 하고 뉴스를 찾아보니 호재로 작용한 게 2개나 있었던 모양이다.

용돈 차곡차곡 모아서 마련한 100만원을 투자해서 3주 만에 5000원의 플러스 상태를 기록했다.

"난 장기투자자다."

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고 있었지만 최근 최고점에서 매입해 그런지 -13%까지 곤두박질친 것이 오늘에야 본전으로 돌아선 것이다.

왜, 주식에 100만원을 투자했나?

사실 안마의자가 너무 갖고 싶어서 100만 원이 580만 원 되면 바로 안마의자 살려고 했다.

그런데 추석에 시골 집에 다녀왔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내 다리보다 나이든 부모님 다리가 더 아프신 거 같아서.

 

정부에서 가지말라고 했지만 우리 지역은 며칠째 환자 발생도 없었고 부모님이 손주들을 너무 보고 싶어 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손자들은 먹지도 않는 송편을 하신다고 굽은 허리로 계단을 오르내리시고 계셨다.

농사일에 때문에 거친 손은 손마디 마디가 남자인 내 손보다 더 두꺼워져 있었다.

넉넉히 드리지 못해도 용돈도 꼬박꼬박 보내드리고 있지만 집이 너무 낡아 보였다.

100만 원이 갑자기 1억이 될 수는 없지만 1억이 된다면 꼭 집을 새로 지어 들이고 싶었다.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아버지는 농사일을 너무 많이 하셔서 무릎 연골이 거의 없으시다.

인공연골 수술을 권해드렸지만 동네에 수술받으신 분이 일을 전혀 못한다고 싫다고 하셨다.

아직은 일을 더 해야 한다. 하고 싶다고. 

고추며 콩이며 팔아서 손주들 용돈 주고 싶으시다고.

그런 아버지가 노래방 마이크가 갖고 싶다 하셔서 전화기로 유튜브 노래방 사용하는 법을 알려드렸다.

눈이 침침하신지 아니면 농사일에 굵어진 손가락 때문인지 자판을 계속 틀리게 누르셨다.

아들과 내가 수십 번을 알려드렸다.

아버지도 이번에야 배우고 말겠다는 듯 반나절을 유튜브로 트롯 노래 노래방 검색하시는 것을 연습하셨다.

내가 집으로 올 때까지 쉬지 않고 연습하셨다.

지금 잘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시골 분이라 문자도 가르쳐드리면 그 다음 날

"담장 핀요 없다. 연습이다."

이런 식에 문자를 보내시지만 다음에 가면 또 

"야야, 전화기가 잘 안된다."

하신다.


내가 가장 어머니에게 미안했던 때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였다.

나는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와서 어린 나이에 자취를 했다.

학부모가 학교에 오는 날이라도 한 번도 부모님이 학교에 오신 적이 없다.

아예 내가 이야기 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원서를 쓰려면 부모님이 학교로 꼭 와야 한다고 담임선생님이 이야기하셨다.

학부모가 안 오면 원서를 안 써주겠다고 했다.

전화로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께 오시라고 했고 그 다음 날 오후 늦게 어머니는 학교로 오셨다.

"야, 저 누구 엄마인데, 완전 촌 아줌마고."

평소에도 말을 싹수없이 하는 한 놈이 그렇게 말했고 난 얼굴이 벌게졌다.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바로 담임 선생님께 불러갔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원서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바로 어머니와 하교하라는 선생님의 말씀도 귀를 스칠 뿐 빨리 교문 밖을 나가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데 내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척 빨랐다.

따라오지 못한 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어머니도 몇 번 부르시더니 이내 멀찍이 떨어져 걸으셨다.

버스로 집까지 오는데 30분.

나는 버스 안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취방에 돌아와서야 어머니는 

"미안하다. 다른 엄마처럼 꾸미고 와야 하는데. 지금 일철이라. 아까는 많이 부끄러웠제"

그렇다. 다른 어머니들보다 못한 옷을 입고 까맣게 그을린 어머니를 내가 피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셨고.

모처럼에 아들과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머니는 그날 밤 바로 시골로 내려가셨다.

자식 공부시키겠다고 입는 것, 먹는 것 아끼셨던, 그 어머니에 가슴에 못을 박은 날이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이후로 바로 철든 것은 아니지만 더 늦기 전에 부모님 집을 다시 지어드리고 싶다.

아픈 무릎으로 계단을 더 오르지 않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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